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약진 운동 (문단 편집) == 특징 ==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 그 유명한 [[토법고로]]와 [[제사해 운동]]도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다. 5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후퇴했다는 점에서 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공칠과삼(공적 70%, 과실 30%) 가운데 과삼으로 비판받는다. [[마오쩌둥]]의 [[중국]]을 대후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받으며, --대후진 운동-- [[문화대혁명]]과 함께 중국 전체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고 평가 받는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기근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연재해지만 자연재해의 피해를 키운 것이 대약진 운동 당시의 여러 실책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천만~5천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는 작정하고 중국인을 죽인 [[난징 대학살]]과 최소 30배 이상 차이가 나는 수치이기에 지도자의 무능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의 경제성장률 통계를 보면 [[마오쩌둥]] 시절의 경제성장률이 쭈욱 낮았던 것은 아니었고, 1950년대 1차 5개년 계획(1953~1957) 때에 9.3%, 1963~1966년도에 두 자릿수대의 고성장률을 기록한 적이 있고 1969년과 1970년에도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으로 1960년과 1961년에 마이너스 25%, 마이너스 27%라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1950년대 초중반에 이룩했던 경제성장의 성과를 싸그리 까먹었고, 이후로 [[류사오치]]의 주도하에서 4년 연속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66년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고 나서는 사회혼란으로 1967년과 1968년 2년에 걸쳐 마이너스 4.1% 마이너스 5.7%의 경제성장률을 목도하였다. 이후로 [[홍위병]]이 하방되어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기저효과로 16%, 1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게 되나 1970년대 초중반에는 침체세를 맞았다. 이처럼 '''두 차례씩이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완전히 말아먹은 탓에'''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이 수십배 넘게 성장하는 동안 중국은 고작 몇 배의 소득성장밖에 이루지 못했다.(1950년대 말 기준으로 홍콩, 대만의 소득수준이 중국과 현격한 격차를 나타냈을 때는 아니었던 만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인 1976년에는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6달러였을 때 홍콩은 2,850달러, 대만은 1,158달러였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는 격차가 더욱 커져서 대만이 중국 경제력의 40% 수준이었고, 홍콩도 절정기에는 중국 경제력의 1/4(1993년) 정도였다.) 이는 대만에게 국력을 급속히 따라잡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서방 국가들도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등 중국에 비해서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세를 유지하던 시절인지라 중국의 순위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오 시절에서부터 1998년 이전까지는 집을 나라에서 배분해주어서 애들 용돈에 불과한 푼돈을 임대료 및 관리비라면서 냈고, 도시 노동자의 경우에는 임금이 낮아도 평생직장을 보장받고 의료도 공짜로 받는 혜택도 있었기 때문에(이런 것들은 [[덩샤오핑]]과 [[장쩌민]] 정권에 걸쳐 불필요한 예산낭비와 부패를 줄이면서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명목하에 속속 유료화되거나 줄어나가거나 폐지되었다.) 실질 구매력은 176달러보다야 높았지만, 그렇다 해도 대만과 홍콩에서 컬러 TV를 비롯한 각종 첨단 전자제품들이 보급될 때 아직도 중국의 대다수 시골에서 전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자가용이라고 해도 자전거를 사서 타던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니 잠재력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 즉 두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가 침체되어 후발 국가들에게 줄줄이 따라잡힌 데다가 그 사이에 발생한 인적·문화적·사회적 손실을 감안하면, 그만큼 발전이 늦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처녀지 개간 운동|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일대에 대규모 농지를 조성하며]]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고 도발하자, 마오쩌둥이 이에 경쟁심을 느끼며 소련과 마찬가지로 농공업의 대증산 계획정책을 내놓으면서 자기는 [[영국]]을 능가하겠다 맞불 놓으며 시작됐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공산혁명과 대약진운동을 최초로 '[[농촌]]이 주체가 된'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는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촌의 [[농민]]들이며, [[산업혁명]]을 비롯한 여태까지의 혁명은 모두 도시에서 주도했으니, 이번엔 농촌에서 혁명을 해보자"는 게 대약진 운동의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도시에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농민들이 토법고로로 [[철(원소)|철]]을 만들고 농촌에서 [[트랙터]]를 조립해 '우리식'의 혁명을 해보자는 것이 대약진 운동의 목표였다. [[의도는 좋았다|의도는 그럴 듯해 보였지만]], 결국 이는 현실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떨어진 이상이었을 뿐이다. 산업화에는 반드시 도시 인구의 증가 및 생산시설의 발전이 필요함을 마오쩌둥이 간과했던 것이었다. 사실 [[저우언라이]]와 [[천윈]],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측근 인사들이나 심복들이 당초에 대약진 운동에 반대하는 등 대약진 운동이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라면서 마오에게 충언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자아도취에 빠져서 이러한 충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무시하거나 자아비판까지 시켜가면서 끝끝내 대약진 운동을 밀어붙였다.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투기자본을 패배시켜 물가를 안정화시키며 화폐개혁도 성공적으로 단행했고, [[부작용|또한 1차 5개년 계획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국민당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던 시절부터 공산당을 이끌었던 탓에 엄청난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저우언라이, 천윈, 펑더화이, 류사오치, 덩샤오핑 모두 주석이나, 총리, 고위 관직을 지냈던 인물이라 비중이 커 보이지만, 이 당시에는 이들을 전부 합쳐도 마오쩌둥의 권력에 비하면 달과 반딧불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절대권력|공산당과 군부의 간부는 물론이고, 모든 당원과 병사들은 마오쩌둥에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기에, 마오쩌둥이 마음만 먹으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 실제로 이들 모두 마오쩌둥의 노선을 비판했다가 숙청당하거나 옥고를 치른 적이 한 번씩 있었고, 저우언라이는 실각당하지 않지만 사인방의 공격으로 수양딸이 죽임을 당하고, 사위가 폐인이 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문화대혁명의 뒷수습을 하느라 고생을 심하게 했다. 여기에 [[반우파 투쟁]]의 여파로 야당이 무력화되어 몇 남지 않은 견제기능마저 무력화되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마오 스스로가 인지부조화에 빠지며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계속 밀어붙였지만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나마 처음으로 "계획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공개 석상에서 직언했던 [[펑더화이]]가 마오의 눈밖에 나 비난받고 실각당하면서 이는 더욱 심해졌다. 만약 펑더화이가 처음 직언을 했을 때인 1959년 7월도에 계획을 수정했으면, 중국의 경제성장세가 잠시 꺾였다 수준으로 그쳤을지언정, 적어도 수천만 명이 사망한 최악의 기근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량 부족 현상 자체는 1959년 중순부터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마오는 이러한 보고를 받으면서도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로 구제는 훨씬 뒤에나 이루어지며 아사자가 대규모로 속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군 공식 서열 2위(실질적으로는 1위)이며 오랫동안 마오쩌둥과 함께 싸워온 심복 중의 심복마저 비판적인 직언을 했다고 쫓겨났던 상황이라 다른 공산당 간부들은 감히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고, 결국 몸보신에 급급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겹치며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었다. 최후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쳐 기근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자 마오가 그제서야 현실을 깨닫고 해외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서 긴급구제에 나서는 한편 할당 생산량 현실화 및 텃밭 허용, [[천윈]] 재기용 등 계획을 수정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수천만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어쨌든 [[중국 공산당]]도 문화대혁명과 함께 빼도박도 못할 정도의 실책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들어간 영화와 소설을 만들 때 [[문화대혁명]]과 함께 단골로 쓰이는 소재이기도 하다. 사실 중국은 유명할 정도로 [[중국/문화 검열|문화의 검열]]이 심각해서 사회 비판 작품을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그나마 공산당도 인정한 실책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현재 사회를 비판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서 자주 써 먹히는 것도 주된 이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